지난 3월 24일 저녁 국제학술회의 참석 차 필리핀 마닐라행 여객기에 올라탄 김정환 강남을지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비행기가 이륙한 지 30분가량이 지났을까, 갑자기 기내 방송을 통해 승무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기내에 의사 선생님 계신가요? 응급환자가 생겼는데 도와주실 분이 필요합니다"
김 교수는 방송을 듣자마자 심상치 않음을 직감, 곧바로 김철민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대한가정의학회 이사장)와 함께 승무원들을 향해 내달렸다. 눈앞에는 필리핀 중년 여성이 바닥에 쓰러진 채 누워 있었다.
"체구가 큰 여성이었어요. 얼굴에 청색증처럼 얼굴이 굉장히 창백하고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더라고요"
여성은 쓰러지기 전에 승무원들에게 자신이 곧 죽을 것 같다며 "다잉(dying)"을 되뇌었다고 한다. 김 교수와 일행 의료진은 기도부터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 삽관을 시도했다. 다행히 비행기에 삽관 장비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쓰는 금속 삽관이 아닌 플라스틱 삽관이어서 환자의 혀가 뒤로 말려들어간 것을 누르지 못했다. 급박한 상황에 '아이겔'이라는 후두 마스크로 대체했다. 기도 삽관 없이 기도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 교수는 청진기를 꺼내 들고 환자의 호흡과 맥박을 체크했다.
"환자가 계속 숨을 쉬나, 안 쉬나 청진기로 계속 들었는데 호흡음이 너무 약해지더라고요. 숨을 잘 안 쉬어서 '엠부'라고 부르는 인공호흡 백, '엠부백'을 넣고 짜면서 숨을 쉬게 했고요. 또 혈압을 재봤더니, 수축 혈합이 80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해서 긴장했죠"
그러다가 호흡정지, 심정지까지 가는 경우가 있는 만큼 의료진은 전기 심장 충격기까지 준비해 놓았다. 10분이 지났을까. 다행히 얼마 후 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경동맥이 다시 강하게 뛰기 시작했고. 혈압도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환자를 깨우고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엠부백을 넣은 상태라 환자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마닐라 가는 것 맞느냐" 고 의료진이 말을 걸자 환자는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답했다.
김 교수는 환자의 오른손은 약간 힘이 들어가는데 반해 왼손에는 전혀 힘을 못 주는 점을 감안, 우측 뇌경색으로 추정했다. 혈관이 막혀 뇌혈류량이 줄면서 저산소증에 호흡부전까지 겪는 심각한 상황, 의사들의 응급조치가 없었더라면 사망에 이르렀을 수도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긴급환자 발생에 기장은 인천공항으로 회항할지, 중국 상하이의 푸둥공항에 비상 착륙할지 의료진에게 의견을 물었다. 의료진은 환자 상태가 호전되는 것을 보고 마닐라행을 권유했다. 그 사이 기장은 필리핀 마닐라 당국에 비상 의료진 대기와 인근 병원 중환자실을 어레인지해 놓았다. 착륙 즉시 환자는 곧바로 필리핀 의료진에게 인계되었다. 50대 중반의 필리핀 여성 환자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의료진에게 눈빛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승무원들도 연신 감사의 표시를 했다. 20년 경력의 한 베테랑 여성 승무원은 비행기에서 종종 환자가 발생하긴 하지만 이렇게 위중한 환자를 본 적은 처음이고, 특히 한꺼번에 많은 의사 선생님들이 동시에 도와주셔서 환자를 살려낸 건 처음 봤다며 내릴 때도 계속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고 김 교수는 전했다.
결과는 좋았지만 목숨을 살리는 과정은 사실 피 말리는 순간이었다.
"환자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굉장히 컸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 환자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저는 저희 의사들이 운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해요. 환자가 더 나빠지지 않고 컨디션을 회복해서 내릴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요. 아무튼 좋은 일을 하게 돼서 저도 기쁘게 생각하고 보람을 느낍니다"
우문인줄 알면서 던졌다.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또 환자를 도우실 건가요?"
물론 돌아온 건 현답이었다.
"한 번 했으니까 또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때는 두려움이 조금 줄어들긴 할까요?"
"그때는 아, 두려움은 늘 있을 것 같지만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는 생긴 것 같아요"
일면식도 없는 승객의 목숨을 살린 그들, 이 시대 진정한 의사들이다.
당시 환자를 살리고 돌본 분들
김철민 대한 가정의학과 이사장(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김정환 강남을지대병원 교수
오한진 을지대병원 전 교수
김영식 서울아산병원 전 교수
선우성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교수
최환석 서울성모병원 전 교수
명승권 국립암센터 대학원장
박영규 대한가정의학회 학술원 회원